이해창 (조선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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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해창은 덕흥대원군의 13대손으로, 대한제국 시기 한성부 판윤을 역임하고, 한일 병합 조약 이후 후작 작위를 받은 조선귀족이다. 1889년 문과에 급제하여 사간원 대사간 등을 거쳐 1904년 한성부 판윤이 되었으며, 창산군으로 진봉되고 유릉수릉관을 지냈다. 1910년 한일 병합 조약 체결 후 후작에 서임되었으며, 조흥은행의 이사를 역임하며 재계와도 관계를 맺었다. 1945년 사망 후 친일반민족행위자로 분류되었으며, 2002년, 2008년, 2009년 발표된 친일 관련 명단에 모두 포함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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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창 (조선귀족) | |
---|---|
기본 정보 | |
이름 | 이해창 |
작위 | 창산군 |
본관 | 전주 이씨 |
휘 | 이해창 |
휘 (한글) | 이・해창 |
휘 (발음) | 이・헤찬 |
초명 | 이봉길 |
자 | 배언 (Bae-eon) |
호 | 인헌 (Inheon) |
출생 | 동치 4년 8월 26일 (1865년 10월 15일) |
출생지 | 이씨조선, 경기도 포천군 |
사망 | 1945년 (쇼와 20년) 3월 2일 |
생부 | 이경용 |
아버지 | 이하전 |
자녀 | 이덕주 |
조선귀족 | |
작위 | 후작 |
습작 횟수 | 1회 |
습작일 | 1910년 10월 1일 |
2. 생애
덕흥대원군의 13세손으로 경기도 포천시에서 태어나 이하전의 가계를 이었다. 1889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이후 사간원대사간 등의 벼슬을 거쳐 1904년에는 한성부 판윤이 되었다. 같은 해 창산군(昌山君)으로 진봉됨과 동시에 종이품에 특자되어 유릉수릉관(裕陵守陵官)이 되었다. 1905년에는 정이품 정헌대부(正憲大夫)가 되었고, 1907년에는 종일품으로 승격하였다. 재임 중 훈일등태극장(勳一等太極章)·대한민국 대훈장(大勲位李花大綬章)을 받았다.
한일 병합 조약 체결 후 1910년 10월 16일에 조선귀족으로 후작에 서임되었다.[5] 한상룡과 이재완 등이 설립한 한성은행(조흥은행)에 1910년부터 민영휘, 조중응 등과 함께 참여하여, 1923년부터 1928년까지 은행의 이사를 역임하였다.
2. 1. 출생과 가계
전주 이해창의 본관은 전주, 자는 배언(拜言), 호는 인헌(仁軒)이다. 처음 이름은 이봉길(李鳳吉)이었으나, 이하전의 양자가 되면서 해창으로 개명하였다. 그는 덕흥대원군의 손자인 당은군 이인령의 셋째 아들인 밀산군 이찬(密山君 李澯)의 9대손으로, 참봉을 지낸 이경용(李慶鎔)의 아들이었다. 이후 당은군 이인령의 장남인 응천도정 증 응천군 이돈의 9대손인 증 경원군 이하전의 양자가 되었다.[1]1872년 (고종 9년) 7월 30일, 경기도 포천군에서 이경용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덕흥대원군가의 장손 이하전의 양자로 정해졌다.[1] 생부 이경용은 참봉을 역임했고, 생모는 아산 이씨로 이현모(李顯謨)의 딸이다. 조부는 이재형(載衡)이고, 증조부는 음서로 감역, 도정을 지낸 이화응(李華應), 고조부는 이관식(李觀植)이다. 그는 19촌 아저씨가 되는 도정궁 이하전의 양자로 정해졌다.[1] 김옥균을 살해한 홍종우의 사위이기도 하다.[1]
이해창의 양아버지인 이하전은 헌종과 철종 대에 왕위 계승 물망에 오른 왕족이었으나, 이해창이 태어나기 3년 전 안동 김씨 집권 기간 중 역모 사건에 얽혀 사형당했다.[1]
이후 포천에서 한성부 서부 사직동 54통 5호(社稷洞 五十四統五戶) 도정궁댁으로 이주하여 성장했다. 이후 음서로 관직에 올라 사과(司果)에 임명되었고, 바로 덕흥대원군의 제사를 받들었다. 이후 참봉(參奉)을 거쳐 도사(都事)를 지냈다.[1]
2. 2. 초기 관료 생활
1884년 충훈부도사가 되었다가 그해 5품으로 승진했다.1889년 알성시(謁聖試)에 병과(丙科)로 합격하였다. 이후 승지, 영 등을 역임하였다. 사간원 대사간 등의 벼슬을 거쳐, 1904년 10월 17일부터 10월 20일 한성 판윤을 역임하였다.[3]
1890년 사간원 헌납이 되었다가 총어영 군사마(總御營軍司馬), 사헌부 장령, 홍문관 응교가 되고, 1891년 수정청 도청(修正廳都廳)이 되어 왕실 족보 선원보략(璿源譜略)의 재편찬 작업에 참여하고, 그해 종친부 도정을 겸임하였다. 1900년에도 선원보략 재발간에 봉상사장 자격으로 참여했다. 1892년 형조 참의가 되었다가 승정원우부승지 겸 경연참찬관으로 발탁되고 사간원 대사간에 올랐다. 1893년 공조 참의, 예조 참의가 되었다. 1894년 다시 사간원 대사간이 되었다가 종정사장(宗正司長)이 되었다.
1897년 8월 봉상사 부제조에서 강화부윤으로 발령받았다.
2. 3. 대한제국 시대
1898년 중추원 의관을 거쳐 얼마 뒤 비서원승이 되었으며, 1903년 전라남도 보성군수로 부임하였다. 1900년 봉상사장을 역임했고, 1904년 10월 한성부 판윤이 되었다.[4]1904년 11월 4일 창산도정(昌山都正)이 되었다가 11월 5일 황제의 명으로 창산군(昌山君)으로 진봉(進封)됨과 동시에 종2품에 특자(特資)되어 유릉수릉관(裕陵守陵官)이 되었다.
1905년 정2품 정헌대부(正憲大夫)로 승진하고, 1907년 11월에는 종1품에 올랐다. 재임 중에 대한제국의 훈일등 태극장(勳一等 太極章)과 대훈위 이화대수장(大勳位 李花大綬章)을 받았다. 1908년 사직동에 학교설립 발기를 하였고, 1909년 기호흥학회에서 월연보조하는 등 민족계몽운동과 교육사업에 힘썼다. 창산군 부인도 양심여학교를 설립하였다. 1908년 대한산림협회 명예회원이 되었다.
1910년 5월 27일 대한협회(大韓協會)에 400KRW을 기부하였다.[4]
2. 4. 한일 합방 조약 이후
1910년 한일 병합 조약 체결 후 10월 16일 일본 제국으로부터 후작 작위를 받았고, 은사공채 168000JPY을 받았다.[5] 1928년 11월 10일 일본 정부로부터 쇼와 대례 기념장을 받았으며, 1930년 1월 22일 창복회로부터 1월분 교부금 250JPY을 받았다.한상룡이 실무를 맡고 종친 이재완을 내세워 조선총독부가 설립한 한성은행에 1910년부터 민영휘, 조중응 등과 함께 참여했으며, 1923년부터 1928년까지는 이 은행의 취체역을 맡았다.
2. 5. 생애 후반
1937년 10월 22일에 조선일보사에 국방헌금 150JPY을 기탁하였다.[9] 잠시 신설동으로 이주했던 그는 태평양 전쟁 시기인 어느 시점에 사직동으로 다시 이사, 되돌아왔다.1939년 9월 14일 사직동 저택에 소유하고 있던 창빈 안씨 위패, 덕흥대원군 위패를 도난당했다가, 절도범을 검거하였다. 절도범 중에는 그의 일족 이학주(李鶴柱, 당시 43세)도 있었다. 흑석동 묘지로 3000JPY을 가져오라는 종이가 있었고, 형편이 어려운 주변인을 수사하다가 일족 중 생활고를 겪던 이학주 등이 연루된 것이 확인됐다.[10]
1939년 조선유도연합회에 참여했으며, 1940년 11월 10일 기원 2600년 축전에 초대받은 공로로 일본 정부로부터 기원 2600년 축전 기념장을 받았다.
1945년 3월 2일 오전 8시 경성부 종로 사직동 262번지 2호 자택에서 노환으로 사망했다.[11] 1945년 3월 6일 사후 일본 정부로부터 특지로 정2위에 추승되었으며, 그의 작위는 장남 이덕주가 습작했다.
3. 사후 평가
2002년 발표된 친일파 708인 명단과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 모두 선정되었다.[12]
이해창이 일제로부터 받은 남양주시 암자 인근 토지를 반환해 달라는 소송을 후손들이 공동으로 낸 바 있다.[12]
4. 가족 관계
혹은 3월 22일